2020년 7월 30일 · 에세이(Null)

통신보안 머스타드일까요?

족같은 군생활

통신보안 머스타드일까요?

총 대신 카메라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조형대학 건물 전체를 통틀어 남자 재학생이 얼마 없었다. 그래서 몇 없는 남자들끼리 뭉쳐 다니자는 으쌰으쌰 분위기가 강했다. 애처로운 노력에도 나는 시류을 타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술담배도, 롤도 하지 않는 나에게, 그들과 가까워지는 일이란, 물살의 반대 방향으로 헤엄쳐야만 하는 일 같았다. 그들은 공강시간에 PC방에서 롤과 피파를 하거나 낮술 해장을 하는 반면, 나는 잔디밭에서 보드게임을 하거나 주변 카페로 허니버터브레드에 빙수를 먹으러 가는 대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남자 동기들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와 멀어진 것 같다.”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복학생 형들은 그런 나를 보며 “너는 성격이 너무 여자 같아서 군대를 가면 안 되겠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아무리 장난처럼 한 말이라고 받아들이려고 해도, 비슷한 말들이 고등학교 동기를 포함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하니 나는 점점 더 군 입대를 두려워하게 됐다. 내가 군대를 다녀오면, 여자 동기 친구들이 학교를 떠난 시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복학생 형들이 하는 말에 지레 겁을 먹은 것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근무환경이 좋다는 통역병을 위주로 지원했지만 전부 떨어졌다. 그러던 중 “부대에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꿀 빨던 정훈병이 있었는데 너에게 딱이겠다”는 말을 들었다. 여태 지원했던 보직들과는 다르게, 점수를 매겨서 가장 높은 점수의 지원자만 뽑는 보직이었다. 나는 유관 전공 가산점을 받아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한 번에 붙었다. 입대 날이 다가오자, 소식을 들은 선배 형들은 “남자가 되어서 돌아오라”는 말로 내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116번 훈련병

내일 입대인게 실감이 안남

현실자각

입대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내가 염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아직 말도 트지 못한 훈련병간에 기싸움으로 분위기가 삭막했는데, 결국 옆 생활관에서 주먹질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친구를 만들어보겠다고 여기저기 말을 걸었던 훈련병은 기분 나쁘게 바라본다는 이유로 피떡이 되어 이빨이 뽑혀 나갔다. 주먹질을 한 훈련병이 끌려 나간 뒤, 우리는 뽑혀나간 이빨들을 찾아 피 바닥을 더듬었다. 그런데 그의 빈 잇몸과 우리가 주운 이빨 개수가 맞지 않아 핏방울을 따라가 보니, 총기함에 이빨이 날아 들어간 것이다. 신경이 죽기 전에 앰뷸런스로 빨리 이송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총기함을 열어도 된다는 상관의 허가를 기다려야 했다.

내 앞번호 115번 훈련병은 내 물건을 계속 훔쳐 갔고, 그 탓에 나는 내 물건이 사라질 때마다 소대장에게 물건 관리를 못 했다고 혼났다. 문제는 군대 보급품이 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내 것을 가져갔는지 찾기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모든 보급품에 나의 군번 116을 흰 실로 바느질해 넣어야만 했다.

한편, 나의 뒷번호, 117번 훈련병은 단체 얼차려의 원흉이었다. 그 때문에 생활관 동기들이 단체로 비난할 때면 “총기 난사를 하고 자살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소대장에게 도와달라고 찾아갔지만, 그는 그저 실소를 보이며 아무 설명도 없이 나를 돌려보냈다. 총기 난사가 가능하지 않게 조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일개 훈련병인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더군다나 입대 직전 뉴스에서는 군 총기 난사 사건을 대대적으로 다룰 때였다.

문득 나는 입대 전 자살 예방 지킴이 교육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상담사가 하던 말투나 질문을 어설프게 따라 하며 내 앞뒤 번호를 매일 밤 달랬다. 동기들이 불만을 가질 때면, 나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부탁하며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117번은 한밤중에 관물대 위에 있던 25kg 풀군장을 밀어 내 위로 떨어뜨렸다. 그 충격에 숨이 막혀 잠에 들지 못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나의 침낭에 바늘을 꽂아놓아 펼쳐진 침낭 위에 드러누웠다가 등 뒤에 바늘이 박히는 날도 있었다. 물론 실수였다고 말하지만, 그가 자신을 괴롭히는 동기들에게는 직접적으로 뭐라 하지는 못하고 결국 만만한 나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보급받은 총이 언제나 가장 먼저 내 등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앞으로 조심해달라는 말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앞에서는 115번, 뒤에서는 117번.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날도 있었다. 이윽고 나는 손을 들고, 분대장에게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외치다가 쓰러져 구급차를 탔다. 군 병원에서는 뭐가 문제인지 검사할 수 있는 장비가 없으니 자대 배치받고 사설 병원에 나가서 뇌출혈 등 정밀검사를 받아보라는 말만 반복했다.

훈련소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에 급작스럽게 분대장들이 생활관에 몰려들어, 내 앞뒤 번호 동기들에게 쌍욕을 퍼붓고 물건을 던졌다. 분대장이 자리를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 생활관 동기들도 그 둘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고 거들며 후련해했다. 나는 그날 밤 잠자리를 옮겨 구석진 빈 관물대 다리 아래로 머리를 집어넣고 밤을 새웠다. 혹시라도 앞뒤 번호가 생활관 동기들을 해코지 할까 봐. 군장을 떨어뜨려서 다치게 하거나, 바늘로 사람을 찌르는 일이 생길까 봐. 차라리 누가 찔러도 다리에 찔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모순되게도 나는 “훈련은 재미있고 우수한 점수를 받았다, 군대에 적응 잘하고 있다.”를 열성적으로 서술한 손 편지를 친구들에게 보내는 데 혈안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왜, 내 주변 훈련병 동기들처럼 “개좆같다 살려줘”라고 솔직하게 적어 보내지 못했을까? 주변 사람들에게서 흔하게 듣던 “공익/면제와는 겸상하지 않는다.” “너는 꼬추 떼고 군대 가지 말아라.” 같은 말들이 그저 짓궂은 농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정작 나는 그 말들이 내 삶에 낙인처럼 따라다닐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이병 박한결

자대에 도착하자마자, 병장 선임들이 생활관 문을 군화로 발로 차며 들어와 멱살을 잡고, 얼차려를 시켰다. 관물대를 시끄럽게 여닫았다는 게 이유였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죽는다는 말에 나는 마음대로 화장실을 갈 수도, 밥을 먹으러 갈 수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부대에 1명만 있는 특수 보직이어서 자대 적응을 도와줄 선임도 없었다. 결국 병장 선임이 전역할 때까지 나는 죽은 듯 숨어 다니며 동기들에게 부대시설과 생활 규칙을 캐묻고 다녔다. 나와 다르게 직계 선임으로부터 부대생활규칙이 적힌 종이를 나눠받은 동기들은 끔찍이도 나를 귀찮아했다.

계급 간 규칙들은 자대 생활 전반에 걸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세탁기, 싸지방, 식당, 전화기, 심지어 도서관 이용 시간까지. 거기에 야간 근무와 빨래를 후임들에게 떠넘기는 일도 다반사였다. 일례로, 내가 급식 배급을 맡은 날, 양 조절을 잘못해서 선임들에게 줄 고기반찬이 모자란 적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일부러 지휘통제실 근무시간을 교대해 야간점호부터 아침점호까지 부대 생활관에 돌아오지 않았다. 선임들이 나를 찾아다닐 때 의도한 대로 나는 생활막사에 없었고, 다행히도 가혹행위를 피할 수 있었다. 군대가 원체 그렇듯 다음 날이면 선임병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조질거리’를 찾아다녔기 때문이다.

낮은 계급들이 울분을 풀 수 있는 ‘유일 정당’한 기회는 바로 ‘전역빵’이였다. 당직 간부에게 들키지 않고 팼어야 했기 때문에 정찰조, 체포조 등으로 역할도 분배했다. 누가 때렸는지 전역자가 알지 못하게 대화가 금지됐으며, 모포를 2중으로 덮고 팼다. 그 결과 빨래 건조대와 철제 의자가 날아다니는 건 기본이고, 다들 너무 열성적으로 임한 나머지 ‘때리는 사람의 팔’이 부러지는 경우도 숱하게 있었다. 부상자가 가장 많이 나오는 관습이었지만, 아무도 상부에 신고해 전역빵을 없애자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역빵이 없어진다는 것은 곧 자신이 당한 것을 되돌려줄 기회가 없어진다는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병사들의 기회도 함께 빼앗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군대에서는 익명성이란 유니콘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다들 목발을 짚는 한이 있어도 ‘축구하다가 넘어져서 다쳤다’ 등으로 사유를 숨겼다. 전역하는 병장들은 본인이 맞을 만한 짓을 했음을 기꺼이 인정하며 1년간의 업보를 하룻밤에 청산하듯 얻어맞은 뒤, 침묵의 대가로 전역 축하금을 챙겨서 부대를 떠났다.

종신보험 머스타드일까요?

내가 상병쯤 됐을 때, 나를 유난히 힘들게 했던 선임이 전역했다. 생활이 좀 편해졌고, 모두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졌다. 너도나도 느슨해지기 시작한 동기들은 군 생활에서 소소한 일탈 거리를 찾아다녔다. 그 무렵, 내가 접한 것은 군대 인사말을 의도적으로 비틀어 부르는 말장난이었다. 애초에 군대 인사 자체가 기계적이고, 듣는 사람 모두가 귀찮아하고, 다들 발음을 뭉개기 때문에 가능한 장난이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마술게임쇼’(맛있게 드십시오)
  • ‘자물쇱니다’(잘못들었습니다?)
  • ‘추석’(충성)
  • ‘전과자님’(지원과장님)
  • ‘햄버거님’(행보관님)
  • ‘종신보험 머스타드일까요?’(통신보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누군가 일과시간에 이런 것만 연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입대 전에 숱하게 들었던 것처럼 나도 군대를 다녀오면 복학생 형들처럼 좀 더 남자다워지고 늠름한 모습이 될 거라 상상했었다. 그러나 가끔 마주 보는 거울 속 형상이, 내가 바랐던 모습도, 나였던 모습도 아니게 변해 간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 ‘말장난’에서 발견한 묘한 감정에 더 기대고 의존하게 되었다. 내가 느꼈던 건, 마치 군인의 신분을 벗고 입대 전의 나로 되돌아간 것 같은, 어떤 자기일치감이었다.

식당 구석엔 “이등병 전용”이라고 선임들이 지명한 테이블이 있었다. TV와 거리가 멀고 관리가 안 돼서 모두가 꺼리는 자리였다. 오히려 나는 밥을 혼자 먹을 수 있다며 좋아했다. 또 신병들이 들어오면 일방적으로 인사를 받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존댓말로 인사를 나누었다. 싸지방에서 마주친 신병들에게 내 아이디를 빌려주기도 했고 (이등병들은 직계선임이 싸지방 아이디를 만들어 줄 때까지는 싸지방 이용을 못 했다), 다른 선임들에게 들키지 말라고 나만 아는 꿀 스팟과 시간대를 알려주기도 했다. 딱히 거창한 의도가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입대하기 이전의 나’가 했을 법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또한 이등병들에게 굳이 한두 마디씩이라도 참견하는 게 내 마음이 편했다. 그들을 위한다기보다는, ‘이등병의 나’를 위로하려는 마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 동기들과 마찰이 생겼다. 이등병/일병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아서 혼을 냈는데, 후임들이 왜 나는 그 규칙을 지키지 않냐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후임들 군기가 빠진 것이 바로 나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본인들은 그보다 더한 부조리를 견뎌왔고 이제야 좀 편하게 군 생활을 해보려고 했더니 내가 다 망친다는 것이었다. 한때 생활관이 떠나가라 농담을 주고받던 동기들은 나에게 적대감을 품었다. 급기야 군대부적응을 이유로 햄버거(행보관)에게 나를 그린캠프로 보내달라 등 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생활관 동기들을 피해 다녔다. 야근을 핑계로 생활관에 복귀하지 않고, 밤까지 본부에 머물렀다. 불이 꺼진 정훈 사무실에서 부대 간부들의 반들반들한 정수리에 마우스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그리며 시간을 때웠다. 종종 옆 생활관 동기들이 나와 같이 밥을 먹으러 이등병 테이블을 찾아오기도 했지만,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물어보려는 의도였다.

더불어 나는 군대에서 사격 훈련도 거부했다. 훈련소에서 총기 난사를 하겠다고 소리 지르던 뒷번호에게 충격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살상 도구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지 않겠다는 고집이 생겨서이기도 했다. 대개 상병쯤 되면 힘들어도 전역일을 바라보며 버티는데, 나는 반대였다. 사격 점수가 있어야 병장 진급을 할 수 있고, 나는 병장 진급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결국 나는 군대 부적응으로 내보내 달라고 병영생활상담관을 찾아갔다.

예상과 달리 상담관은 내가 정말 원하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매 상담마다 마음을 바꾸었다. 어느 날은 더 이상 못 하겠다고 내보내달라고 했다가, 다음 상담에는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병장 만기 전역”이라는 꼬리표가 나에게 붙는다고 상상하니 그 자체로 혐오스럽게 느껴졌음과 동시에, 그 꼬리표가 없다는 이유로 나에게 향할 “취직에 불이익이 있다던데”와 같은 군대 밖 사회적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뜬금없이 여단장 표창장을 받으면서 사격 점수 없이 병장 2개월 조기 진급을 했다. 결국 군대 부적응 심사를 받는 것보다 그냥 부대에서 숨을 쉬는 것이 더 빨리 전역하는 길이 되어, 더 이상 내가 선택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저씨

군 생활 동안 만났던 수많은 사람 중 유독 자주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바로 우리 부대 병사들이 “통신 아저씨”라고 부르던 친구이다. 사실 그는 나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입대한 같은 부대 동기였다. 내가 속해있는 본부근무대와 그 친구가 속해있는 통신대대가 두 개로 나뉘면서 생활하는 공간이 분리된 것인데, “이제 남이다”라는 말이 병사뿐만 아니라 간부들 사이에서도 숱하게 들렸다.

정작 실내 아침 점호를 할 때면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는 거리였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막사에서 반말로 장난을 주고받던 동기들이 지체 없이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말엔 어떤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타 부대 병사를 아저씨라 부르며 ‘다나까’체가 아니라 ‘~요’체 사용한다는 군대 문화를 따라 해보고 싶어 하는 장난스러운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편했고,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언제든 그를 복도에서 마주치는 순간이면 예외 없이 사활을 건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말로 정한 적은 없지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눈만 마주쳤다 하면 그 친구는 필사적으로 달려와 나를 엎어 메고 자신의 생활관으로 끌고 갔다. 그의 관물대에 도달하고 나서야 나는 자유의 몸이 되어 원래 하던 일을 마저 하러 갈 수 있었다. 역으로 그를 내 생활관으로 끌고 가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지 않다. 그는 눈 깜빡 안하고 실망했다는 듯이 나를 집어들어들 뿐이었다. 결국 못 이기는 척 목마를 타고 그의 생활관으로 옮겨지다가 부사관 하사와 마주쳐 어색한 “충성”을 하곤 했다.

종종 야간 연등이 허가된 날이면 그 친구는 나를 찾아왔다. 그의 생활관 내 다른 아저씨들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는 침상에 같이 앉아 TV를 보거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말엔 운동을 가르쳐주겠다며 체력 단련실로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운동하는 게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싫지는 않았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생활관 동기 중 한 명이 우리를 향해 뜬금없이 “너 쟤랑 친해?”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순간 나에게 ‘올 게 왔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짧은 말 한마디가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몸을 바짝 굳게 만들었다. 내 인생 속에서 그 말은 ‘누군가가 조롱받는 위치에 있다’는 은근한 낙인이었다. 그런 사람과 친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자신을 그 낙인의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짧게 “어.”라고 대답하고는 무심하게 자리를 떴다. 나는 그 친구의 그런 말과 태도가 낯설었다.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과거의 친구들은 모두 “친하지 않다”며 내 앞에서 잔인하게 선을 그었었고, 그로 인해 많은 관계가 뒤틀렸었다. 그렇다고 그의 대답에 내 마음이 기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나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받았던 시선이 그에게까지 오염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슴에 얹혔다. 이런 나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친구는 나와 복도에서 마주치자 또 죽을 듯이 돌진해 왔다.

그 친구는 직업 군인이 되기를 원했다. 특수부대 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앞으로 몇 달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PX 가는 길에 급작스럽게 소식을 전했다. 그 시험이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하는 그의 말 뒤편엔, 그 방향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체념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표면적으로만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발에는 군화 대신 캔버스화를 신고, 머리엔 군모 대신 볼캡을 쓰고 있었다. 병사가 아닌 간부의 신분이 된 그 친구는 병사 생활관에서 간부 숙소로 이사도 갔다. 병사와 간부가 서로 반말을 쓰며 어울리다니. 주변의 시선이나 말들을 그 친구도 느꼈을 법한데, 그는 태연하게 간부 체력 단련실을 같이 쓰자며 나를 불러내거나, 자신의 계급장을 나에게 붙이며 장난을 치곤 했다.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 훈련 빠지려고 아픈 척한다. 금수저라고 남을 무시한다.” 군대라는 좁은 수직 공간에서 누군가의 평가나 소문은 너무나도 쉽게 왜곡되고 굳어지기 마련이다. 그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개의치 않고,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나를 믿어줬다. 돌아보면, 그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위로는, 어디가 됐든,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해준 것이다.

전역

나의 전역일이 가까워지자, 부대 내에서 꽤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첫째로 부조리를 강하게 단속했다. 전역빵, 전역 축하금, 빨래 심부름 등 다양한 것들이 사라졌다. 전역한 이후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내가 상담관에게 징징대며 말한 애로사항들이 상부에 보고됐고, 여단장의 지시로 부조리를 단속하고 내가 만기 전역할 수 있도록 알게 모르게 도와준 것이었다.

또한 몇몇 후임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페이스북 친구 요청과 함께 “축하드리지만, 전역하지 말아달라”는 메시지도 받았다. 늘 나와 말을 붙여보고 싶었는데, 내가 특수 보직이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어 아쉬웠다는 것이다. 내 행동들이 군대 부적응자의 이기적인 땡깡으로만 보일 줄 알았는데, 다르게 봐주는 후임들이 한두 명이라도 있었다는 게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다.

반면 내 생활관 동기들은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나만 빼고 전역 기념 외박을 나가 술자리를 즐기고, 단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일부러 나에게 보란 듯 즐거운 시간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속상함에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의 전역날은 조용히 찾아왔다. 옆 생활관 동기들은 모두 전역해서 없고, 고맙게도 내 후임 두 명이 위병소까지 나를 배웅해 줬다. 내 친구는 간부 숙소에서 시간을 맞춰 싸제 섬유유연제 냄새가 풀풀 나는 사복을 입고 마중 나와 있었다. 내 전역일을 주변에 물어 기억해뒀다는데, 그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더욱이 나는 그가 병사 신분을 끝으로 간부로 임관하는 날에 오전 근무가 있어 인사를 하지 못했던 터였다. (또한 정훈병으로서 그의 임관식을 사진으로 담는 것은 나의 역할이었다.) 미안함을 전하자, 그는 그날 아침에 지휘통제실 근무자 명단을 보고 내가 올 수 없을 걸 이미 알고 있었다며 웃어 보였다.

그 친구는 위병소를 통과해 버스 정류장까지 내 짐을 들어주었고, 버스가 올 때까지 곁에 머물렀다. 평소 같지 않은 침묵이 불편했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서로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잘 알기에 그러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먼 곳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를 향해 “넌 참 한결같다.”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전했다. 그는 직후 강원도 구석진 곳으로 부대 전출을 갔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궁금하다.

한결같기를

여전히 군대는 나에게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따금씩 잠을 자다가 악몽에 깨곤 한다. 군대에서 생긴 갈등과 어려움을 성숙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자괴감이 나를 괴롭힌다. 왜 나는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나, 왜 나는 이 모양인가, 끝없는 질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면서도, 결국은 내 모자람 탓에 모든 것을 망쳤다는 원망으로 되돌아온다.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불안정한 사람이구나”라고 바라보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적 거리감이, 군인이었던 시절을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볼 용기를 준다. 그땐 나의 선택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에, 차마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를 ‘한결같다’고 바라봐 주는 시선 속에서, 결이 같은 마음을 품고 함께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스스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애써 간직하려했던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나이길 바라는 마음,
내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저 한결같기를 바라는 마음이다.